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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칭(伍淑清), 조국을 위해 일생을 바치다

2018-04-03 글| 장진원(張勁文)

우수칭이 베이징항공식품유한회사 설립 당시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VCG 

 

“모든 기업가들은 저마다의 꿈을 꾼다. 그러나 이 꿈은 반드시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관련되어야 한다.” 정협 제 10, 11, 12기 전국위원회 상무위원, 베이징항공식품유한회사 명예회장 우수칭의 말이다.

 

홍콩 상업계에서 우수칭은 전설적 인물이다. 재벌가의 딸로 태어났지만 바닥에서부터 창업을 배웠고, 마침내는 요식업계의 기업가로 성장했다. 중국 본토에서 우수칭은 ‘001샤오제(小姐, 아가씨)’로 더 유명하다. 중국 개혁개방의 어려움을 타파하는 과정에 참여한 그는 중외 합자에 있어 가장 먼저 과감한 도전을 했다. 훗날 내륙에서 수 십 개의 합자 혹은 독자기업을 설립했으며, 세계무역센터협회(WTCA)를 무대로 중국 국내외 100여 개 단체의 중국 방문을 인솔했다. 자선사업과 빈곤지원사업에 투신하며 다음 세대의 건강한 성장을 도운 인물이기도 하다.

 

올해로 71세가 된 우수칭은 여전히 맹활약 중이다. 주변인들은 그가 일평생 너무 큰 희생을 치렀다고 말하지만, 우수칭 본인의 생각은 다르다. “나는 매일 금은 장식을 두르고 수다를 떨며 카드를 치는 한가로운 삶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에는 희생이란 것이 없다. 선택만 있을 뿐이다.”

 

1979년 9월, 중국민항총국은 홍콩 메이신그룹과 베이징항공식품유한회사와 공동 설립 MOU 체결식을 열었다. (왼쪽에서 5번째 우수칭) 사진/ 우수칭 본인 제공 

 

치열함 속에 성장한 ‘여장부’

우수칭의 이 같은 선택은 그가 자라온 환경과 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영향을 받았다. 1948년 홍콩의 한 애국화교 집안에서 태어난 우수칭의 본적은 광둥(廣東)성 타이산(臺山)이다. 부친인 우잔더(伍沾德)와 큰 아버지 우순더(伍舜德)는 1950년대 작은 식당을 시작으로 창업에 뛰어들었으며, 훗날 이를 300여 개의 매장 및 제과점을 보유한 홍콩 메이신(美心)그룹으로 키워냈다.

 

홍콩에서는 재벌가의 여식들을 가리켜 ‘태자녀(太子女)’라 부른다. 어린 시절부터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며 그야말로 공주의 삶을 누리는 태자녀들. 그러나 ‘금수저’로 태어난 이들 가운데서도 일부는 ‘무(無)’에서부터의 치열함을 선택하기도 하며, 후천적 실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우수칭이다.

 

우수칭은 중학교 시절을 홍콩의 새크리드 하트 카노시안 칼리지(Sacred Heart Canossian College)에서 보냈다. 가톨릭 학교의 엄격한 교육을 받은 그는 이후 1967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비서 과정을 연수했다. 영국에서의 유학기간, 학교가 교내 재학생 행사를 조직할 때마다 우수칭은 참기 힘든 모욕감을 느끼곤 했다. 학생들이 한데 모여 줄을 서는데, 영국 현지 학생들이 맨 앞줄에 서고, 다른 구미지역 학생들이 다음 줄에, 아시아 학생들이 그 다음 줄에 서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시아 학생들의 줄 가운데서도 중국 학생의 자리는 늘 안 좋은 자리였다.  

 

영국에서 공부한지 8개월여 만에 우수칭은 미국 암스트롱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경영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해외에 머무를 때면 늘 받던 질문이 있었다. 바로 “일본인 인가요?”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우수칭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오! 나는 중국인입니다!”라고 대답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왜 외국인들은 나를 일본인으로 여기는 것일까?” 아마도 조국이 강대하지 못하고 가난하며 낙후한 이유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중국인으로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우수칭이 선택한 것은 학업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2년 반 만에 4년 동안 이수해야 할 과정을 모두 수료했다. 전 과목에서 A를 받은 우수칭. 그 결과 그 해의 ‘우수학생’ 영예는 중국 홍콩 출신의 이 여학생에게 돌아갔다. ‘우수학생’은 암스트롱대학이 매년 전교생 중 단 1명에게만 수여하는 상이었다.

 

1970년 우잔더의 식당이 일본 엑스포에 참가하게 되면서 우수칭은 그 곳에서 잠깐 일하게 됐다. 일본 요식업계가 ‘손님이 왕’이라는 원칙을 가장 잘 지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언제나 웃음 띤 얼굴로 허리 굽혀 인사하며 손님을 위해 문을 열고 닫는 일까지 신경 쓰는 일본 직원들의 서비스를 우수칭은 그대로 소화해냈다. 뿐만 아니라 영업이 끝난 뒤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른 나라의 부스로 가 그곳 사람들과 교류하고 한 가지라도 더 배우기 위해 애썼다. 보통의 다른 참가자들 보다 더 큰 수고를 아끼지 않은 그였다.

 

6개월 뒤 홍콩으로 돌아온 뒤에는 부친을 도와 추이위안(翠園) 식당을 운영했다. 식당 경영에 참여하자마자 우수칭은 이 식당을 유명 식당으로 키워냈다. ‘추이위안’은 홍콩을 찾는 관광객들이 필수로 들려야 하는 식당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홍콩 요식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할 무렵, 북방에서 날아온 소식 하나가 그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베이징항공식품유한회사는 중국 개혁개방 이후 비준, 설립한 첫 합자기업이다. 사진은 2018년 11월 29일, 직원들이 작업장에서 항공식품을 포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VCG 

 

합자기업 설립을 위한 도전

1978년 12월 10일, 신화사 홍콩지사의 인솔 하에 우수칭을 포함한 12명의 홍콩 사업가들이 쓰촨(四川)성 청두(成都)를 찾았다. 당시 처음으로 내륙을 방문한 것이었다. 12월 23일 그는 우한(武漢) 발 광저우(廣州) 행 열차에서 라디오를 통해 덩샤오핑(鄧小平)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요지는 아직까지 뚜렷하게 기억한다. 덩샤오핑은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외상(外商)의 중국 투자를 환영한다’고 말했다.” 베이징에서 날아온 이 같은 소식은 우수칭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였다. 그것은 경제발전을 중점 추진하겠다는 국가의 신호였던 것이다.

 

신호와 함께 찾아온 것은 비즈니스 기회였다. 1979년 1월 1일 중국과 미국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 데 이어 항공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중미 직항 항공노선 취항이 결정됐다. 당시 미국 측은 중국 측에 반드시 기내식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덩샤오핑은 중국민항국(中國民航局)에 1980년 5월까지 기내식품을 마련하라고 강력히 주문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때까지만 해도 중국 내륙에 기내식 생산능력을 갖춘 기업이 전무했다는 것이다. 

 

운명처럼 찾아온 기회. 우수칭과 그의 부친 우전더는 중국민항국과의 접촉을 시도하면서 내륙에서 항공식품을 공급할 방법을 모색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내륙에는 합자기업 관련 선례가 없었으므로 협상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하나하나 직접 알아보면서 진행해야 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1979년 6월부터 9월까지 홍콩과 베이징을 최소 7번 이상 왔다 갔다 했다. 회의에도 많이 참가했고, 계약 내용 수정 관련한 협상에도 수 없이 참여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상 과정 중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많은 경우 양측 모두 글로써 소통했다.”

 

1979년 11월, 중미간 항공노선 취항까지 불과 6개월여 밖에 남지 않았지만 기업 설립은 아직 승인을 얻지 못한 상태.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민항국 국장은 우잔더에게 “라오우(老伍, 연장자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 우리는 모두 중국인이잖소. 비용을 먼저 지불해줄 수는 없겠습니까?”라며 물어왔다. 우수칭은 그 때를 회상하며 “아버지는 ‘우리 모두 중국인 아니냐’는 말을 들은 후 그 즉시 500만 홍콩달러를 선지불하기로 결정하셨다”고 기억했다. 실제 우잔더와 국장은 서로의 손을 맞잡았으며, 항공식품 관련 사업을 사실상 확정했다. 하지만 또 다른 난관이 남아 있었다. ‘냉전’과 같은 국제적 원인 하에서 구미 주요 국가들은 중국에 대해 금수조치를 취하고 있었고, 때문에 다수 선진설비들을 중국 내륙으로 직접 들여올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우씨 부녀는 홍콩으로 돌아가 500만 홍콩달러를 마련, 중국 홍콩이라는 특수 위치를 이용해 해외의 선진 설비를 구매했고, 그렇게 항공식품기업을 설립했다.

 

1980년 4월, 메이신그룹과 중국민항총국은 베이징항공식품유한회사를 설립했다.‘외자심자(外資審字) (1980) 중외합자기업 제1호’라고 적힌 ‘설립허가증’에서도 알 수 있듯, 중국 최초의 합자기업이 탄생한 것이었다. 1980년 5월 2일 중미 항공노선 개통 후 베이징을 떠난 최초의 미국 비행기에는 베이징항공식품유한회사의 기내식이 실렸다.

 

이후 중국 내륙에서는 중외합자·중외합작·외상독자 형식의 ‘3자(三資)기업’이 등장했고, 얼마 뒤에는 그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베이징항공식품유한회사를 가리켜 ‘천하 제1호’라 부르기 시작했다. 우수칭 역시 ‘001샤오제’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누군가는 개혁개방이 어려움에 처해 있던 중국에 있어 ‘언뜻 불어온 바람이 봄 연못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킨 것(風乍起, 吹皺一池春水)’과 같다며, 그 때의 우씨 부녀와 중국민항국은 순풍을 탔던 것이라고 말한다. 개혁개방의 바람을 탄 그들은 자신들의 역량을 더해 중국을 위해 큰 일을 해낸 것이다.

 

인진라이(引進來)·저우추취(走出去)의 조력자

내륙 합자기업의 선구자일 뿐만 아니라 우수칭은 중국의 ‘인진라이(외국 자본·인재·관리경험·기술의 유치)’와 ‘저우추취(해외 진출)’에 가장 먼저 참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1976년 홍콩 세계무역센터협회를 설립한 우수칭은 1980년대 베이징항공식품유한회사를 경영하면서 외국 기업가들의 중국 방문 및 시찰을 이끌었다.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었다. 당시 국가가 개방을 필요로 한다고 느꼈고, 나에게는 외국 친구들을 데리고 올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수칭은 당시 홍콩과 대륙을 바쁘게 오가며 각종 사무를 처리했다. 얼마나 비행기를 자주 탔는지, ‘공중비인(空中飛人)’이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다.

 

‘인진라이’에 주목함과 동시에 우수칭은 중국의 ‘저우추취’ 또한 중시했다. 그러던 중 1995년 글로벌 고급 비즈니스 시설 및 서비스 일체화 네트워크 플랫폼이던 WTCA 이사로 취임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중국의 국제무역네트워크 참여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의 적극적인 노력 끝에 WTCA는 중국 각 성(省)·시(市)의 입회 회비를 기존의 17만5000달러에서 2500달러로 낮춰주었고, 또한 그의 열정에 힘입어 베이징·난징(南京)·광저우·선전 등 16개에 잇따라 WTCA 지회(支會)가 설치되었다. 중국 대외무역 관련 국제 통상무역 정보네트워크가 구축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이(吳儀) 당시 베이징시 부시장을 모시고 미국에서 열린 WTCA 총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우 부시장은 연설 마지막에 영어로 ‘중국에 와서 함께 나아갑시다’라고 말했는데, 현장에 있던 내빈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1997년 홍콩 경제에 대한 서방의 ‘쇠퇴론’을 불식시키기 위해 우수칭은 WTCA 연차총회를 홍콩에서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당시 중국 대외무역경제협력부 장관이었던 우이가 다시금 초청되었다. 우이는 “전세계가 (중국에) 반환된 홍콩에서 사업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2015년 WTCA에서 물러날 때까지 우수칭은 외자 유치와 중국 국내기업의 해외진출 지원에 있어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다. 지금도 WTCA 명예이사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홍콩은 중국이 국제사회로 나아가는 데 있어 아주 훌륭한 플랫폼이다. 우리의 각 단계별 발전에 필요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첫 문을 여는 작업을 잘 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국가가 ‘일대일로’ 구상을 제시했고, 현재 주변 국가 중 40개 이상 도시들이 우리의 회원이 되지 않았나? 우리는 그들을 통해 우리 기업들의 해외진출을 도와야 하고, 현지 시장과도 연계되어야 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2018년 보아오포럼 폐막식 연설에서 “중국 개방의 대문은 닫히지 않을 것이고, 더욱 활짝 열리기만 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시 주석의 이 같은 연설에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는 우수칭. 외국의 핵심 기술 및 인재 유치를 위해 더욱 발 빠르게 움직이며, 더욱 매력적인 초청 조건을 만드는 것이 우수칭의 바람이다.

 

홍콩중화청소년 역사문화교육기금을 설립한 우수칭은2015년 7월, ‘상하이 교류단 및 엑스포 경제 포럼’이라는 주제로 교류활동을 진행한 바 있다. 사진은 교류단 일행이 자오웨이싱(趙衛星) 상하이해외연의회(上海海外聯誼會) 부회장과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이다. 사진/ 우수칭 본인 제공 

 

공익사업을 위한 노력

지난 수년 간 우수칭은 고강도의 업무상태를 이어오고 있다. 매일 새벽 1시가 넘은 뒤에야 잠이 들고는 6시가 되기 전에 일어난다. 회사 업무를 챙기는 것은 물론, 공익 및 자선사업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우수칭은 내륙과 홍콩을 오가며 홍콩의 청소년들이 중국 전통문화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고, 또한 앞 세대 홍콩인들이 갖고 있던 조국에 대한 불변의 애국심 또한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특히 중국 대륙이 홍콩에 대한 주권행사를 회복한 1997년 7월 1일, 주권 반환으로 홍콩인들의 인심(人心)까지 반환된 것은 아니며, 이제 겨우 시작임을 알게 된 이후 어떻게 홍콩 청소년들에게 조국의 박대정심(博大精深)한 문화와 유구한 역사를 이해시키고, ‘조국에 대한 사랑, 홍콩에 대한 사랑’을 심어줄 것인가 하는 고민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둥젠화(董建華) 홍콩특구 행정장관의 도움으로 홍콩중화청소년 역사문화교육기금을 설립한 우수칭은 기금 집행위원회 주석으로서 자신의 모든 정력과 열정을 관련 업무에 쏟아 부었다. 1998부터 현재까지 기금은 수십  개 대표단을 조직해 학생 수 천명의 중국 내륙 내 교류를 지원하고 있으며, 행사의 완성도·규모·지속성 면에서 홍콩과 내륙 간 청소년 문화교류 최적의 플랫폼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는 우수칭의 영향을 받은 홍콩과 내륙의 많은 인사들 또한 공익사업 추진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는 우수칭에게 무한한 동력이 되었으며, 그로 하여금 멀리 떨어진 설역(雪域)의 고원으로 눈을 돌리고 그곳의 자연과 아이들에게까지 관심을 갖도록 했다. 설역 고원의 눈 먼 아이부터 세계박람회 전시관에 이르기까지, 어느 프로젝트 하나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없다.

 

많은 일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수칭은 자신을 알리는 데 매우 소극적이다. 일례로 중국 서부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았지만 그의 가족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심지어 부친인 우잔더 조차 2004년 10월 언론보도를 통해서야 자신의 딸이 5년간 티베트를 30번 이상 오갔던 사실을 알았을 정도다. 이후 마음이 애달팠던 우잔더는 우수칭을 타일렀다고 한다. “보통 1-2번만 가도 지치기 마련인데, 아무리 일 때문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건강을 돌보지 않으면 어떡하냐”고 말이다.

 

우수칭이 티베트에 간 것은 대부분 공익을 위함이었다. 일찍이 홍콩에서 ‘중국 티베트 어린이 건강교육기금’을 조성했던 그는 해외 및 민간 루트를 통해 티베트 어린이들을 지원함과 동시에 티베트 장애 아동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데 앞장서 왔다. 또한 티베트 농촌에 건강센터를 설립하고 어린이 건강검진·백내장 아동 수술을 지원함으로써 아동들의 건강 증진에 힘썼다. “티베트라는, 중국 서부 땅에 자리잡고 있는 그곳이 너무 좋다. 칭짱(靑藏)고원 상공을 가로지를 때마다 마음이 두근거린다. 인간세계에서 보기 드문 그 기세와 아름다운 풍경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인구 고령화 문제가 부각되고 있는 가운데, 우수칭은 재가(在家)양로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노인들이 가정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돌보고, 어떻게 스스로의 건강 상황을 확인할 것인지, 또 의료시설 및 서비스를 어떻게 배치해야 할 것인지가 요즘 그의 새로운 고민거리다. “홍콩에서 재가양로를 시범적으로 해볼 계획이다. 이는 국제 표준에 부합하는 생활 및 소통형 리빙 빌리지(living village)다. 웨강아오대만구(粵港澳大灣區, 광둥·홍콩·마카오 경제권)에서 시범적으로 해본 뒤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내륙 양로사업 발전을 위해 참고할 만한 것을 제공할 것이다.” 고희를 넘긴 우수칭이지만 그의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분투 중인 ‘001샤오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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